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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초소 바로 앞에는 섬 세개가 바다에 떠있었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앞엣 섬은 주민이 사는 섬이고,
그 뒤로 나란히 떨어져 있는 섬은 둘다 무인도였다. 작은 바위섬들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죽도는 자연스럽게 육지와 연결되어 걸어서 갈 수 있었지만
뒤엣 섬들은 언제나 물에 떠있었다.
이상하게도 섬은 언제 보아도 무슨 할 말이 있듯 사람의 마음을 붙잡는다.
초소에 근무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요모조모가 눈에 들어왔다.
낮은 언덕 하나 넘어로 염전이 넓게 펼쳐져 있고, 멀리 해안이 굽어지는 끝에
무인등대가 밤마다 깜빡거렸다. 처음엔 그것이 별인 줄 알았다.
마을아낙들은 물만 빠지면 갯뻘로 나가 굴을 캤다.
마을마다 육이오때 월북한 사람이 하나 둘씩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김형도이병이 주로 마을샘터로 내려가 물을 길어오거나 식기 닦았기 때문에
아낙들의 동정을 받았다.
'궁벽한 촌에 들어와서 고생 참 많유. 군인은 집이 어디래유.'
'어쩌자구 저 군인들은 손 하나 깐딱 안하고 군인만 부려먹는대유,
지 먹은 그릇 지가 닦을 중 모르고.'
그런 김이병 덕분인지 우리는 가끔 집에서나 맛 볼 수 있는 밥반찬을 얻어 먹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관심을 쏟는 건 어느 집에 어떤 처녀가 있고 이름이 뭐냐는 거였는데
그런 것도 주로 김이병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야, 김이병. 너 아까 샘터에서 얘기 나눈 여자말야, 어떻디.'
'여자는 무신. 오빠가 우리처럼 군대에 있는데 헌병대 하사라데요.'
'하, 내 처남될 사람이 헌병 하사라.'
'꿈도 꾸지 마소. 이제 열 다섯짜리 앤데 무신.'
'마, 그런 걱정말고 본관과 잘 엮어지도록 노력 좀 해 봐.'
초소로 오는 편지는 구장인 장씨네 집에 맡겨졌다가 나중에 우리손에 들어왔다.
김이병에게 오는 편지가 대부분이었고, 내게 오는 편지는 거의 없었다.
월남에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한 보따리씩 받은 적도 있었다.
이상하게 고참이 되면서 편지쓰고 싶은 생각도 점점 없어져 결국 편지해 줄 여자들이
죄다 떨어져 나가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가끔 초소바닥에 엎드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일기불순한데 아버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시고-.'
그때도 아버지는 여전히 마장동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었다.
'야, 이 애비 몸뗑이 어떠냐고 물어서 모 한다구 그러네.
니나 몸뗑이 제대루 건사하라. 술 많이 테먹디 말구. 상관 잘 뫼시구,
밑에 사람 괴롭히디 말라. 이 애비 말 명심하라. 그라믄 이만 쓰갔다. 애비가 一字 썻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 한 통이 해안근무하는 동안에 받은 편지의 전부였다.
김이병이 가끔 자기한테 온 편지를 우리에게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이건 편지가 아니라 커다란 화선지에 그림과 글씨가 곁들여진 예술작품이었다.
매번 받는 편지가 모두 그랬다. 대학다니면서 만난 동양화 전공의 여자라는 김이병의 얘기였다.
'마, 기회 생길 때 꼽아둬, 아낀다고 놔뒀다가 놓치면 말짱 도루묵되니까.'
고참으로서 졸병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충고였다.
한밤중 빤쓰사건 이후 나는 소대원들과 약속한대로 나무를 해서 져날랐다.
지게와 도끼는 장씨네 것을 빌려 매일 산에 올랐다. 나무할 데는 얼마든지 있었다.
장씨네 외양간에서는 여전히 딸랑거리는 소방울소리가 들렸고,
장씨부부 배사이에 방석 끼워 주기는 유야무야 장난말로 끝난 것 같았다.
'얌마, 니네들 나 제대하고 나면 숙소 땔감 어떡할려구 그래,
나 따라 다니면서 나무하는 법 좀 배워 둬.'
'배울게 없어서 나무하는 걸 배웁니까? 그때 쯤이 되면 날씨도 풀리겠죠.'
제대할 고참을 끝까지 부려먹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사안에 묶여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다니는 것이 좋아 상관하지 않았다.
소대장도 나의 근무 이탈을 알고 있으면서 뭐라고 탓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허, 이건 군인이 아니라 완전히 노무자네그려.'
죽도로 들어가 나무 한 짐을 해 오는데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 낮술로 귀까지 벌개진
장씨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장씨 집성촌이라 구장일 보는 장씨가 아니고 다른 장씨였다)
마침 쉬려던 참이라 지게를 내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어디 다녀오시나 보군요.'
'으응, 황촌에 집안 대사가 있어서 댕겨오는 길여.'
본래 군대생활에 재미를 붙인 사람인지 초소가 들어설 때부터 나타나 시시콜콜
참견이 많고 고참행세까지 하려들었다.
'식사들은 했나'하는 소리로 아침저녁으로 초소에 얼굴을 디밀었고,
어쩌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김치 한 보시기를 들고 와서는 '소대 집하압!' 하고 외치는 장씨였다.
'이봐, 병장. 날 촌사람이라고 무시말고 들어. 아레게 밤에 소대장 집합이 있었다메.
그게 뭣 때메겠어? 척 하믄 삼척이구, 퍽 하믄 호박 널쳐지는 소리 아니겠어?'
지게줄에 다시 팔을 꿰고 끙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장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모르겠지만 걸어가면서 들어도 될 소리 같았다.
'아, 언네들도 속이 허전하믄 대이꾸 울어쌌치 안느냐말여.
그거와 한나 다름 없는 이치라 이 말여 내말은 시방.'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아먹을 재간이 없었다.
나는 어깨쭉지가 빠지는 것처럼 아파 죽겠는데.
'무슨 말씀인 데요?'
'어허, 병장은 몰 몰러두 한참 몰러. 내가 졸라도 해남서 군대생활 했을 때 대위 하나랑
출장을 가질 안았겠어. 저녁때 대위가 나보구 느닷읎이 뭣 좀 읎냐는 겨. 내가 척 알아들었지.
저녁되기 전에 다방 아이 밴밴한 거 하나를 얼렁얼렁 궈 삶아서 저녁에 턱허니 엥겨붙였지,
뭣 좀 읎냐든 대위한테 말여. 하, 여잘보더니만 좋아 죽더먼. 아예 까무라쳐.
그 담부터야 내 군대팔자 확 폈지, 뭐. 으하하하.'
어느새 마을어귀까지 다달았다. 장씨네 집은 초소 반대 쪽이었다.
'내가 시방 한 말 틀렸나 보라구. 나 정확한 사람여. 나 여기서 그만 갈라네.'
'네, 조심해서 올라가십쇼.'
장씨 등 뒤로 인사를 하고 나도 초소 쪽으로 접어들었다.
촌사람얘기는 그러니까 나더러 색시거간꾼 노릇을 하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아무렴 소대장이 몇 살이나 먹었다고 어느새 여자를 밝힐까.
나보다도 어린 소대장에게 그런 일을 주선하다니 무슨 흉한 꼴을 소대장에게
또 당할 지 몰라도 그 짓만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장씨네 소 목에서는 여전히 방울소리가 났고 장씨 말대로 집합 당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소대분위기에 활력이 될만한 일이 생겼는데
그게 뭐냐면 김이병의 여자가 면회를 온 것이다.
소대초소 창설이래(그래봤자 4개월 겨우 넘었지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면소재지에 시외버스가 들어오는 건 하루에 딱 두 번뿐이었다.
소초는 소재지에서 30분이 넘게 벌판을 걸어야 올 수 있는 해안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도 김이병의 여자가 거길 찾아온 것이다.
'고생들 하시네요. 김이병님한테 얘기 많이 들어요. 모두 좋으신 분들이라고.'
김이병의 여자는 어깨 위까지 닿는 긴 생머리에 까만색외투를 입고 있었다.
'김이병 저 시키, 나뭇꾼도 아니믄서 어떻게 저런 선녀를.'
문제는 외지 손님을 맞아본 적이 없는 이곳에서 김이병의 여자를 어떻게 하룻밤
지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였다. 사람왕래가 빈번한 곳이 아니라 소재지로 나간대도
여관 따위는 있질 않았다.
'아, 걱정할 거 읎슈. 우리방 그대루 쓰믄 되잖유.'
장씨가 선선하게 나왔다.
'제가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드나 보네요.'
김이병의 여자가 미안해 했다.
'아뉴, 우리야 상관읎슈, 성님 집이 바루 건너에두 있구. 우리야 걱정할거 암 것두 읎슈.'
'그럴 거 없습니다. 제 방을 쓰게 하겠습니다. 저야 소대원들이랑 함께 있어도 됩니다.
이봐, ㅇ병장, 가서 내 방을 깨끗이 치워놓도록.'
소대장이 못을 박았다.
하, 소대장한테 저런 구석도 있다니, 역시 지휘관노릇 할만 하군.
저녁식사는 장씨네집에서 모처럼 손님이라며 우리까지 대접을 해주었다.
김이병의 여자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우리에게 포장지에 싼 물건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김이병 저시키 오늘밤 크리스마스 선물하나 진하게 받겠네.
우리가 먼저 일어서자 김이병과 여자도 따라 일어섰다.
'저희 때문에 잠자리도 뺏기고, 소대장님, 죄송해서 어쩌죠.'
'죄송하긴요. 걱정 마시고 좋은 시간을 가지십쇼. 김이병, 그만 들어가봐라.'
'예, 알겠습니다. 충성!'
'야, 김이병, 방석같은 거 필요없겠냐?'
김이병에게 내가 물었다.
'방석같은 거 우린 없어도 돼요. 걱정마세요. 병장님, 호호.'
김이병 대신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초소로 넘어오는 길에 주점(酒店)이 아직 불을 밝히고 있었다.
술독에 막걸리를 받아놓고 됫박으로 퍼서 파는 집이었다.
'야, 우리 모처럼 막걸리나 받아다 마셔볼까?'
소대장 입에서 나온 뜻밖의 소리였다.
'그러지 마시고 소재지에 나가서 한 잔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여자있는 주점도 있다는데.
저 돈 가진 거 있습니다.'
'얌마, 군인이 무슨 여자냐. 헛소리말고 이 돈으로 술이나 받아와.'
소대장이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눈이 내릴 듯 검은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술주전자를 가운데 놓고 소대장과 나와 상병은 반합뚜껑에 술을 따라 마셨다.
안주거리로는 당연히 사랑얘기, 여자얘기, 군대얘기, 인생얘기가 잡탕으로 올려졌다.
소대장과 상병은 나의 사고가 너무 염세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공박했다.
나는 그들의 공박을 공박했다.
받아온 술이 모자라 상병이 한번 더 주점엘 다녀와야 했다.
상병이 들어오면서 눈이 내린다며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계급만 아니라면 소대장이나 나나 상병이나 모두 한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이일 뿐이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다.
만날 인연이 있어 만난 거고, 헤어질 인연이 아니래도 우리는 헤어질 운명이다.
인연이 무어고, 운명은 또 무어냐.
이따금 토벽이 부서져 사락사락 흘러내렸다.
미안함다, 소대장님. 어이, 상병나리, 잘 해 부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뒤뜰로 돌아가 눈 위에 오줌을 갈겼다.
김상병 이시키 지금 몇 밤째 자고 있을까. 낼 만나믄 한번 물어 봐야지.
제일 먼저 무너진 소대장이 코를 벌룸거렸고, 벽에 기댄채 모로 쓰러진 상병이 잠꼬대를 했다.
'당소, 소머리 작대기 셋, 셋이라구. 야, 씨바라, 안들려.. 다시 탱고하라구.'
아침에 일어나니 눈은 멈춰 있었고 천지는 온통 은백색으로 덮혀있었다.
초소 앞 섬들이 유빙처럼 하얗게 떠있었다.
김이병과 여자가 숙소가 아닌 해안쪽에서 올라왔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에요.'
'많이 불편하셨죠. 또 놀러오신다면 그땐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소대장과 우리는 김이병네를 초소 앞까지 배웅했다.
김이병은 물론 여자가 버스를 타는 소재지까지 다녀와야 할 것이다.
언제 쫓아왔는 지 장씨가 작은 보퉁이 하나를 김이병 손에 들려주었다.
'별 거 아녀, 촌음식 맛이나 보시라구. 도시사람 입에 맞을라나 모르겄네.'
'폐만 끼치고 가네요.'
'그런 소리 마류. 폐는 무신 놈의 폐유. 암때구, 다시 또 놀러와유.'
김이병과 여자가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언덕을 내려갔다.
한참 말이 없던 장씨가 입을 열었다.
'하야간에 즈 냥반들 기력두 참 좋아. 밤새두룩 잠 한잠 안자구, 참, 대견혀.'
밤새 잠두 안잔 정도라니, 장씨의 뒷말이 기대되었다.
'눈은 쏟아지는데 둘이서 밤새도록 하냥 벌판을 돌아다니더라니께.
그런디두 멀쩡허니 저렇게 간다구 나서니 대간하지 않냐 말여.
나는 눈 맞고 댕기는 거 보다 샥시 보듬고 자는 게 젤루 좋턴디. '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 두사람 뒤를 길게 쫓아가고 있었다.
출처:www.vietv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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