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 1971년 늦여름이었을 게다. 어느 날 갑자기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사연인즉 미스코리아가 핫팬츠에 ‘소데나시(민소매)’ 차림으로 선글라스를 쓴 채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아랫마을 출신으로 자신이 미스코리아가 되게 가피를 베풀어준 동네 암자의 부처님에게 인사차 들른 참이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초특급 패션의 출현에 온 동네가 나가자빠질 뻔 놀랐고, 심지어 사추리가 근지러운 총각들조차
그녀의 눈부신 몸매를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노인들은 “망측하다”며 말세를 쳐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무릇 여인네들이란 속속곳에 단속곳을 받쳐입는 걸 법으로 알고 있는 판에
멀쩡한 허벅지를 허옇게 드러내고 소매도 없는 옷을 걸치고 나타났으니….
그래도 노인들은 ‘일등 미인’(미스코리아를 그렇게 통역했다)한테 인사를 받는 게 대견해 더 이상 군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사건은 그 뒤에도 한참 동안 동네방네 화젯거리였다. 70년대도 이랬으니 60년대는 오죽했을까.
지금 50대 이상의 시골출신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그 시절 옷에 대한 추억-.
요즘 넘쳐나는 물질의 홍수 속에 그것은 그다지 유쾌하지만도, 그렇다고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닌,
그 시절에 주어진 한 장의 사진일 테다. 자-,그럼 그 속으로 들어가볼거나.
참, 60년대는 무척이나 가난했다. 전쟁의 포연은 사라졌지만 그로부터 시작해 4·19, 5·16 등의 격변으로 인한
‘가난의 포연’은 얼마나 독기가 심했던지….
오죽하면 군사쿠데타의 강령이랄수 있는 이른바 ‘혁명공약’조차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시급한 민생고 해결을…’
운운하지 않았던가. 북한의 김일성이 “쇠고기 국에 이밥을 먹게 해주겠다”고 그랬다지만 남쪽에서도 점잖은 양반조차
“뜨끈한 멱국에 이밥 한 그릇이면 진량이니라”하고 배고픔을 호소하던 때였으니까.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그나마 ‘악수표’ 옥수수가루나 분유(미공법 301조에 따라
지원하는 구호물자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가 지급돼 근본적인 허기는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늘 누르팅팅한 데다 허옇게 버짐이 먹은 모습들이었다.
도회지는 시골보다 조금 사정이 나을지 몰라도 오십보 백보였다. 사람의 형편을 가늠할 때 첫째가 먹성이요
둘째가 입성이라. 먹성이 이럴진대 입성이라고 달리 따져볼 까닭이 있겠는가.
남학생의 경우 형편이 좀 되는 집안 자식은 검은 ‘쓰봉’에 검은 ‘우와기’를 한 벌로 하는 교복(지정된 것이 아니라!)을
입었지만 나머지는 광목에 물을 들여 만든 ‘엄마표 ’한복을 버젓이 입고 다녀야 했다.
물론 겨울엔 솜을 두어 한 땀 한 땀 누빈 누비옷을 입었다.
여학생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무릎까지 깡총한 검정 치마에다 쪽물을 들인 저고리 패션이 대부분이었다.
기계충 먹은 자리가 군데군데 박힌 빡빡머리 머슴애들과 목덜미를 사뭇 치켜올린 단발머리의 계집애들-.
(요즘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아닌가.바로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이다.우리도 예전엔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 아이들은 설과 추석 등 명절날만 목을 빼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빔이란 걸 기대해볼 수있었으니까.
설빔, 추석빔. 요즘 애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정작 설빔 등으로 나오는 건 색동양말이나 내복이 고작이었지만 머슴애의 경우 ‘고리땡’바지,
계집애들에겐 ‘간따꾸’(일본에서 유행한 원피스식의 간단복을 이르는 말로 형태는 비슷하면서도
주로 고전주의 풍의 층치마가 주류를 이뤘다)라도 차례가 오면 그야말로 기분이 최고였다.
혹여 겨울철 도꾸리라도 얻어걸리면 내내 벗지 않고 살아 땟국이 이드르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솔캥이(솔기)마다
이나 서캐가 열병식을 하기 일쑤였다. 자식들이 이 지경인 판에 어른들은 호사하고 다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당시 거지가 많아 날이면 날마다 듣다시피한 장타령의 대목처럼 여름바지 홑바지, 겨울바지 솜바지가 보통의 패션이었고,
조금 행세한다면 ‘재건복’(재건국민운동본부가 권한 복장으로 훗날 새마을운동복으로 연결된다)이 고작이었다.
정말 ‘가다마이(양복)’는 학교 선생님(그중에서도 교감·교장)이나 면장님이 아니면 구경조차 힘들었다.
일부에선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사지(serge)’로 옷을 만들어 입고 폼을 잡기도 했다.
엄마들도 평소엔 젖퉁이가 꿰져나오는 홑적삼에다 몸뻬로 삼백육십오일을 살다 어쩌다 한번 한복이라도
갖춰 입는 날은 명절 등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자식의 운동회나 ‘원족(소풍)’때 비로도 치마저고리에 양산을 받쳐든 사람은 당연히 ‘사모님’이었다.
65년 월남전 파병 이후엔 화려한 꽃무늬 등으로 얼룩덜룩한 통치마 모양의‘월남치마’가 유행하기도 했다.
70년대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뭐 도시에선 멋쟁이들 사이에 콘티넨탈이니 아이비니 하는 패션들이
유행했지만 시골에선 간간이 흘러들어오는 ‘새농민’잡지를 통해 어쩌다 한 번씩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고작이었다.
도시로 통학하는 중·고생들이 유행에 따라 나팔바지나 일자바지를 입고 나타나면 어른들로부터 대번에
“미친 놈”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고, ‘야전(휴대용·야외전축의 줄임말)’에 맞춰 다이아몬드 스텝이라도 밟을라치면
빗자루 찜질은 받아놓은 밥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잠방이·등거리 바람에 맥고자(밀짚모자)차림으로 땡볕을 마다하고 ‘꼬뱅이’가 쑤시도록 일을 하는 판이었으니 성할 리가 있나.
더욱 가관인 것은 ‘민증’도 나오지 않은 주제에 엄연히 미성년자 출입이 금지된 읍내 다방에 드나드는 일이었다.
그것도 미제 군복을 줄여 염색한 나팔 ‘스몰’에다 새 워커를 콘크리트 바닥에 갈아 만든 백구두로 한껏 멋을 부리고서.
이 대목에서 한 술 더 뜨는 건 언제나 ‘레지’들. 뻔히 알면서도 오빠 오빠 하면서 가장 비싼 쌍화차(항상 계란 노른자를 띄웠다)를
“ 자기 거와 내 거”두 잔씩 시키면 그만 바람이 들어 “위스키 다블 앤 에그 후라이-”를 외치곤 했다.
어느 결엔 나팔바지를 입은 놈이 가랑이를 펄럭이며 잘난 체하다 늘어지긴 마찬가지인 레지의 판탈롱을 밟아
그 비싼 차를 쏟는 해프닝도 간간이 벌어졌다.
이즈음 멋쟁이 여성들 사이에선 철을 가리지않고 ‘칠부’패션이 유행했는데 특히 짧은 소매를 커버하기 위해
목이 긴 장갑을 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촌놈들이라고 그냥 있을쏜가.
팔꿈치 위로 올라가야 하는 하복을 늘려 ‘히찌부’를 만들곤 등교 땐 속단추를 끼워 안으로 넣었다가 교문을 나서기
무섭게 끄집어 내고 으쓱 대던 일이 눈앞에 삼삼하다. 그나마도 ‘빈티’들은 사시장철 교련복으로 때우고
애꿎은 모자만 일부러 찢어 깁거나 빵을 넣어 불뚝이가 되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대학생들도 별반 다르지않아 70년대 후반 블루진이 유행할 때도 시골 출신들은 히피 장발에 염색한
군용 야전잠바로 무장한 채 티를 내곤 했다.
이들에게 양복이란 축제나 미팅 때 큰맘먹고 친구나 세탁소에서 빌리는 귀물이었다.
지금이야 잘 나가는 인사라도 그 시절 얘기 때 코끝이 벌게지는 이라면 필시 ‘빈티족’이었음에 틀림없다.
돌이켜보면 80년대에 들어서나 부족하나마 얼추 삶의 모양새가 갖춰졌으니 다 가난한 시절,
가난하게 태어난 팔자 탓이요 세월 탓이다.
[중앙일보/[한국사회 100대 드라마/이만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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