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해안가는 내륙보다 곱절은 더 추웠다.
산뚱반도를 거쳐온 북서풍을 온몸으로 막바로 받아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해안에서 근무했을 때 나의 군대생활은 말년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나 말년 기분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그때 우리 소대 사정은 어땠냐 하면 육칠팔 세 분초가 해안선을 따라 2키로 간격으로
떨어져 나가 있었고, 소대에는 소대장을 비롯하여 달랑 세명이 소대요원으로 남아 있었다.
겨울추위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놈의 소대장 신경질만 아니라면
말년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소대막사가 지어지기 전이라 동네 빈 집 하나를 소대막사로 빌어 썼고,
소대장숙소는 동네 구장일을 보는 장씨(張氏)네 행랑채를 얻어 쓰고 있었다.
행랑채 옆에 바로 붙어있는 외양간에서 소여물 씹는 소리와 밤새도록 딸랑거리는
소방울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지 소대장은 아침마다 우리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물론 구장과 구장마누라가 밤마다 배 부딪치며 내는 소리도
소대장의 불면에 한 몫 했을 거다.
사람 신경질 내는 것을 타고난 성격이려니 허투로 볼 일이 아니고,
니 아무리 짖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며 마냥 참고 지낼 일만은 아니었다.
국민적 화합을 위해서라도 신경질 부리는 놈 있으면 그 원인을 찾아 분석하고,
그 원인요소를 제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었는데
그때 미처 그런 손을 쓰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날 밤 소대장이 완전히 헤까닥 해서 소대막사에 나타나 길길이 날뛰었다.
'야, 이 시키덜, 집합. 열외자 하나 없이 전원 빤쓰바람에 집합!'
초저녁 분초 근무상황을 점검할 때만 해도 멀쩡했던 소대장이었다.
저녁 먹은 게 뭐가 잘못됐나. 우리는 매일 반합에 밥을 끓여
보이스카웃처럼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빨리 집합하라는데 뭘 꾸물거려, 이 시키덜아.'
우리는 입고 있던 옷을 재빨리 벗어 던지고 그가 시키는 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도열해 섰다.
건조한 북서풍이 웬 떡이냐며 당장 달려들어 온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모처럼 만난 먹이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듯 우리 몸을 물고 흔들어댔다.
아랫도리는 바짝 옴츠러들었고, 심장이 멎어드는듯 했다.
'이 시키덜, 니 덜 오늘 내 방에 불 땠어? 안 땠어?'
'땠습니다.' 화부담당 이병이 대꾸했다.
'사기 치지 마, 이 시키. 불 땐 방이 왜 그렇게 시베리아야, 이 개시키덜얼 당장 그냥-.'
발 아래부터 얼어오며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아래턱이 바짝 조여져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으으-.
'그리고 너 이 시키. 고참이란 시키가 그렇게 밖에 못하겠어?'
'도띰하겠뜸따아-'
얼어붙은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뭘 도띰해, 이 시캬.'
이제 셋의 입에서 동시에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참으려 한대서 멎어지는 이빨소리가 아니었다.
몸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따다다다-
온몸이 마비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소대장이 우리를 풀어주었다.
'앞으로 똑바로 해, 이 시키덜.'
소대장이 숙소로 사라지자 우리는 방안에 뛰어들어 얼마 전에 빠져 나왔던
낡은 모포 속으로 뛰어 들었다.
미처 따라 들어오지 못한 북서풍이 밖에서 몸부림치듯 창문을 할퀴고 있었다.
그때 들어갔던 모포 속은 어땠는가.
이 세상에 와서 천국의 맛을 볼 수 있었다면 아마 그때 그 모포 속이 아니었을까싶다.
온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안온함이 그 안에 있었다.
그건 차라리 짜릿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따뜻함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그런 끔찍한 기합의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때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긴급회의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대장의 신경질은 단순 우발적인가 아니면 본래 생겨먹은 성향이 그 모양인가.
그에 따른 해결책은 또한 무엇인가.
우리는 한동안 머리를 짜내느라 말을 아꼈다.
'말들 좀 해 봐, 시키들아, 시간만 자꾸 끌지 말구. 이대로 있다가 그냥 또 당할 거냐구.'
'짬밥그릇 많은 고참이 그런 건 더 잘 알 거 아녜요. 먼저 말씀 해보세요, 우리야, 모..'
'좋아, 숙소가 춥다니 산에 가서 나무 해오는 건 내가 맡겠다.'
사실 나무해 오는 거 하나 만큼은 옛날부터 자신 있었다.
육군정량 몇 년에 두뇌가 워낙 단순 무능해져서 인지 내 머리로는
그 정도 밖에 말 할 게 없었다.
'소방울소리 시끄럽다니 수 일 내로 소방울 떼 내는 일을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허, 좋고. 좋은 생각이긴 한데 장씨가 알면 가만있을까? 그건 그렇고 막내야,
넌 한창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갈텐데 어째 아이디어가 없냐?'
'없긴요, 있죠. 구장아저씨랑 구장마누님 밤에 일 보실 때 배에다
방석 같은 거 하나 끼구 밤일 좀 보시라고 부탁하믄 어떨까요.'
사제밥 끊은 지 석달도 채 못되는 막내 이병놈의 생각이었다.
'그래, 그런 아이디어 맹그느라 수고 많았다. 오늘 회의 그만 끝내자.'
역시 군대는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훨씬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밤중 기온이 영하권으로 급강하한다는 소식에 옛날 일을 잠시 떠올렸다.
그때 천국의 희열을 함께 느꼈을 김형도 이병(도형?),
미안하지만 이름이 영 생각 안 나는 또 다른 상병 하나.
물론 한경연(韓庚淵)소위도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다.
출처: www.vietv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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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감동이 전해온 옛시 두편
군대 이야기 - 해안초소의 추억(2)
